본문 바로가기

추천

(206)
봉숭아꽃물 - 임희구 오십을 바라보는 형과 형수가 마주앉아 봉숭아꽃물을 들입니다 형은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형수는 열 손가락 모두 봉숭아꽃물을 싼 비닐종이를 실로 칭칭 동여매고 형수가 불안한 손가락으로 삼겹살을 굽습니다 서로 닿지 않도록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벌리고 천장 보며 누워 있던 형이 날 보고 소년처럼 사르르 웃습니다 다 구운 삼겹살을 담아내온 접시에 형수의 손에서 흘러나온 봉숭아 꽃물이 붉게 묻어있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 철도 없이 꽃물 들어 일렁이는 가을 저녁 새하얀 첫눈이 내릴 것만 같습니다
노랑꼬리연 - 황학주 노랑꼬리 달린 연을 안고 기차로 퇴근을 한다 그것은 흘러내린 별이었던 것 같다 때론 발등 근처에 한참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손을 내밀 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니까 길에 떨어진 거친 숨소리가 깜박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거다 아물면서도 가고 덧나면서도 가는 그런 밤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할지 네게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도착하고 있거나 잠시 후 발차하는 기차에 같이 있고 싶었다 그런 내 퇴근은 날마다 멀고 살이 외로워 노랑꼬리 연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어디에 있든 너를 지나칠 수 없는 기차로 갔었던 것 같다 너의 말 한마디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댓살이 내 가슴에도 생겼다 꼬리를 자르면서라도 사랑은 네게 가야 했으니까 그것은 막막한 입맞춤 위를 기어오르는 별이었던 것 같다 내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肖像(초상) -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어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비가 - 유하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비 오듯 그립습니다 한 방울의 비가 아프게 그대 얼굴입니다 한 방울의 비가 황홀하게 그대 노래입니다 유리창에 방울방울 비가 흩어집니다 그대 유리창에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집니다 흩어진 그대 번개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흩어진 그대 천둥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내 눈과 귀, 작달비가 등 떠밀고 간 저 먼 산처럼 멀고 또 멉니다 그리하여 빗속을 젖은 바람으로 휘몰아쳐가도 그대 너무 멀게 있습니다 그대 너무 멀어서 이 세상 물밀듯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빗발치게 그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오래된 편지 - 전남진 행복하다는 말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 네가 들어와 살면서 내 마음은 아침을 타고 내리는 가을햇살이거나 창에서, 눈동자에서, 손등에서, 얼굴에서 반짝이는 모든 표정이거나 밤빛에 하얗게 터지는 벚꽃, 혹은 수면에 닿아서야 움직이는 별빛이거나 너 없이도 나는 고요한 듯 보여 내 마음에 네가 흐르지 않는 것 같으나 행복하다는 말, 사실은 어두운 골목 후회의 마디를 꺾으며 걸어가는 쓸쓸해진 저녁 같은 것이지 내 속을 흐르고 흘러 마음을 파내고 있다는 말이지
영혼의 편지 - 반고흐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땐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에 검게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아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 등이 지상의 운송 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 수단일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 .
칼과 칼 - 김혜순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겹겹의 불꽃 - 정채원 극지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1906년에 극지를 탐험하 면서 북극 산맥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그 광경에 나는 감동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칠 년 뒤 자연사박물관의 탐험대가 크로커랜드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피어리가 본 것과 똑같은 신기루만 보고 돌아왔다. 다양한 밀도의 대기층이 겹겹의 렌즈처럼 만들어내는 이 미지들은 극지 탐험에 지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북극의 끝없는 얼음 위에 떠 있는 히말라야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면 산맥은 자꾸 뒤로 물러나다가 해가 지면 끝없는 얼음 바다만 펼쳐지겠지. 마녀 모르간이 맘만 먹으면 펼쳐 보이는 세상에 속는 척 빠져보면 어떨까?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인 세상. 가짜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함께 낄낄대며 건너가는 유쾌한 ..
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그렇게 왔다. 사랑은. 마치 눈에 띄지 않은 꽃봉오리 가 벌어지듯이, 그렇게 천천히. 사랑이었을까. 그것이.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토록 유약하고 아름다운 거짓 - 구현우 그렇게 멀어지지 말아요 당신에게 들리도록 혼잣말을 한다. 물결에는 영원이 있 다. 그 물결에 익사하는 어류가 있다. 젖은 발이 마르 기엔 이른 시간이다. 그런 우울은 증상이 아니라 일상 이어서 많은 결심이 자정을 넘기지 못한다.
Goodbye Summer - f(x) (Feat. D.O.) 기억해 복도에서 떠들다 같이 혼나던 우리 둘 벌서면서도 왜 그리도 즐거웠는지 알았어 그날 이후로 (Yeah Yeah) 우린 늘 (Yeah Yeah) 쌍둥이 별자리처럼 넌 나 나는 너였어 졸업하기 전날 많이 울던 너 남자라고 꾹 참던 너 하고 싶었던 말 못하고 뜨거웠던 그 여름처럼 안녕 친구라는 이름 어느새 미워진 이름 감추던 감정은 지금도 아픈 비밀의 기억일 뿐 우리 사인 정리할 수 없는 사진 보면 가슴 아린 story, I'm sorry 여름아 이젠 Goodbye Yay-Yeah What do I say We didn’t have to play no games I should've took that chance I should've asked for u to stay And it gets me down..
너는 사랑과 죽음이라 했다 - 구현우 너는 사랑과 죽음이라 했다. 나는 너를 사랑의 죽음으로 이해했다. 유서 같은 것이었다. 이 세상 어디엔가 있어도 살아서 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너의 것이라 유서 같은 것이었다. - '나의 9월 너의 3월' 시인의 말
돌 저글링 - 손미 오늘은 가지마요 언니 살점이 떨어져도 사랑은 해야 하니까 가까이 , 제일 가까운데 있어요
하나의 몸이 둘의 마음을 앓는다 - 구현우 나는 사랑을 유예한다. 잠든 사람이 반드시 꿈을 꿀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대부분 잠들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살아 있지도 않는 내가 잘 사냐고 너에게 묻고, 그러니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덜 아프다는 것이 나아졌다는 것으로 착각되는 일. 번화한 도시의 우울한 홀로. 이 세계는 온종일 밝다. 그 안에서 웃는 사람은 우는 사람과 거의 동일하다. 나의 병명을 아무도 모른다.
아찔 - 오은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저마다 삶은 자아를 향해 가는 길이며, 그 길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추구하는 좁은 길을 암시한다. 지금껏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누구나 출생의 찌꺼기, 태고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삶의 끝까지 갖고 간다. 더러는 전혀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쳐버리고. 도마뱀에 그쳐버리고, 재미에 그쳐버린다. 또 더러는 상체만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계가 던진 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같은 협곡에서 나오고, 어머니가 같고, 유래가 같다. 우리는 같은 심연에서부터 시작되니 시도이고 투척이다. 하지만 자신 나름대로의 목표를 실천하며 노력한..
복숭아 기억통조림 - 이은규 꽃 피다 지다 너는 이제 없는 사람 나는 복숭아 예쁘게 자르는 일 따위를 소일거리 삼야 하루 한 생을 견디고 있구나. 있지 않구나 알고 았니 복숭야의 꽃말은 사랑의 노예 그리고 천하무적 너에게 나에게 우리에게 어울리기도 어울리지 않기도 한 꽃말에 귀가 멀고. 그토록 멀지 않고 이제 너는 없는 사람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기한이 끝나지 않기를 꼭 기한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적어야지 오래된 문장을 안부 삼고 있구나. 있지 않구나 나는
그러나 가끔 선연한 - 구현우 순수 박물관으로 간다 순수한 너의 나를 만나러 간다 사방에 번지는 끝 모를 경보음 보이는 가치만을 믿을 것 백지로부터 비롯된 네가 그렇게 싫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구조되었다 어쩌다 나는 따뜻한 얼음을 조각했다 한때 너무 잘 어질러진 것들이 영원히 전시되어 있다.
언젠가 되기를 바라는 건 당신 같은 사람 - 구현우 당신을 흠모한 적이 있다. 다국적자의 감정은 섞인 물감 같은 것. 한때 내가 생각한 당신은 빨강보다 적색에 가까운 사람.
엽서 - 김지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볼펜이 말 안듣는 걸 봐 아니야 잊었어 귀밑머리 하얘지고 한 달이 하루같이 바삐 스러져가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어 잊어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함께라는 그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아니야 엽서 위의 얼룩은 눈물자국이 아니야 창살 사이 흩뿌리는 빗방울자국이야 아니야 벽 위에 손톱으로 쓴 저 구절들은 네게 바친 것이 아니야 습작이야 습작 손 무디어지기 않기 위해 그래 잊어줘 난 벌써 잊었어 단 하나 함께라는 말 지금 여기 끝끝내 우리 함께라는 말 그 말만 잊지 말아줘 나머지는 얼굴도 이름마저도 다 잊어줘 난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벌써 잊었어 애린이란 네 이름마저 그 옛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