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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내 손이 - 류시화 오늘 처럼 내손이 싫었던 적은 없다 작별을 위해 손을 흔들어야 했을때 어떤 손 하나가 내 손을 들어 올려 허공에서 상처 입게 했다 한때는 우리 안의 불을 만지던 손을 나는 멀리서 내 손을 너의 손에 올려 놓는다 너를 만나기 전에는 내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었다 새의 날개인 양 너의 손을 잡았었다 손안 가득한 순결을 그리고 우리 혼을 가두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내 손이 싫었던 적이 없다 무심히 흔드는 그 손은 빈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도종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 마음 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나의 자랑, 이랑 - 김승일 넌 기억의 천재니까 기억할 수도 있겠지. 네가 그때 왜 울었는지. 콧물을 책상 위에 뚝뚝 흘리며,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 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네가 사귀던 애는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나는 방 안을 서성거리면 내가 네 남편이었으면 하고 바랐지. 뒤에서 안아도 놀라지 않게, 내 두 팔이 너를 안심시키지 못할 것을 다 알면서도 벽에는 네가 그린 그림들이 붙어 있고 바구니엔 네가 만든 천가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네가 만든 노래들을 속으로 불러보면서. 세상에 노래란 게 왜 있는 걸..
여,자로 끝나는 시 - 심보선 안녕하세여, 어디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여, 우리 피시방에서 만났던가여, 아니, 전생이었던것 같네여, 어떻게 지내셨어여, 전 오늘 좀 슬퍼여, 사실 애인이랑 막 헤어졌어여,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 뭘여, 제가 나쁜 놈이지여, 저 위 좀 보세여, 저놈의 달은, 누가 자기 자리 뺏어갈까 봐 낮부터 저러고 버티고 있네여, 참 유치하지여, 한 백 년 만인가여, 기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 해여, 다 어머니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도대체 누구냐고여, 몇 생 전이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런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
여름의 끝 - 박연준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헛된 바람 - 구영주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 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 그 예고 없음처럼. 저녁별 이정하 그런다고 뭐 달라질게 있으랴 내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당장 숨을 거둔다해도 너는 그자리에서 그대로 냉랭하게 나를 내려다 볼 밖에 내 어둔 마음에 뜬 별 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었지만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청춘 -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지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
성욕 - 김재진 내 속에 있는 짐승이 소릴 지른다. 네 발로 기고 있는 이 안면몰수의 사랑스러움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처럼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기에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일인 것 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
소녀의 거울 - 이기인 처음엔 모자를 벗었어요 조금 더웠으니까요 그리고 갑자기 엉덩이에서 뿔이 났어요 밤새 엉덩이를 더듬어보다 거울을 보았어요 소녀가 소녀에게 말했어요 이젠 너도 살찐 소가 되었구나, 축하해 소녀가 먼저 여인숙으로 들어가고 엉덩이 살을 한 근만 팔라고 조르던 그 정육점 남자가 조용조용 뒤따라왔어요 그 정육점 남자의 저울 위로 올라가 맛있는 부위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겠어요 내장은 안 팝니까, 아저씨 살살 해요 안 아프게 살점만 떼어가세요 다만 살 한 점을 팔아치운 소녀는, 몸이 가벼워졌어요 가죽을 벗었으니까요 이제 두꺼운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손바닥을 모으니 삶의 가죽이 너무 두껍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점점 길게 기도하지 못했어요 소녀는 거울을 보며 자기 젖을 빨고 있는 송아지를 생각하고 얼룩 송아지는...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 문태준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아픈 몸이 - 김수영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모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 그 골목이 나를 돌리라 - 아니 돌다 말리라)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 저 말(馬)도 절망의 소리 병원 냄새에 휴식을 얻는 소년의 흰 볼처럼 교회여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해묵은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어라 오 썩어가는 탑 나의 연령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
둘에 하나는 제발이라고 말하지 - 황병승 천장에 붙은 파리는 떨어지지도 않아 게다가 걷기까지 하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바닷가에 갔지 맨 처음 우리가 흔들렸던 곳 너는 없고 안녕 인사도 건네기 싫은 한 남자가 해변에 누워 딱딱 껌을 씹고 있네 너를 보러 갔다가 결국 울렁거리는 네 턱뼈만 보고 왔지 수족관 벽에 머리를 박아대는 갑오징어들 아프지도 않나봐 유리에 비치는 물결무늬가 자꾸만 갑오징어를 흔들어놓아서 흑색에 탄력이 붙으면 백색을 압도하지만 이제 우리가 꾸며대는 흑색은 반대편이고 왼손잡이의 오른손처럼 둔해 파리처럼 아무 데나 들러붙는 재주도 갑오징어의 탄력도 없으니 백색이 흑색을 잔뜩 먹고 백색이 모자라 밤새 우는 날들 매일매일의 악몽이 포도 알을 까듯 우리의 머리를 발라 놓을 때쯤 이마 위의 하늘은 활활 타고 우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메리제인 요코하마 - 황병승 메리제인 우리는 요코하마에 가본 적 없지 누구보다 요코하마를 잘 알기 때문에 메리제인 가슴은 어딨니 우리는 뱃속에서부터 블루스를 배웠고 누구보다 빨리 블루스를 익혔지 요코하마의 거지들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너는 걸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항구의 불빛이 너의 머리색을 다르게 바꾸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어느 해보다 자주 웃었고 누구보다 불행에 관한 한 열성적이었다고 메리제인 말했지 빨고 만지고 핥아도 우리를 기억하는 건 우리겠니? 슬픔이 지나간 얼굴로 다른 사람들 다른 산책로 메리제인 요코하마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 청아 내 그대를 사랑함에 있어 한 점 부끄럼 없다 단지 후회를 하자면 그 날, 그대를 내 손에서 놓아버린 것 뿐 어느새 화창하던 그 날이 지나고 하늘에선 차디찬 눈이 내려오더라도 그 눈마저 소복소복 따듯해 보이는 것은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일까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 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비 오는 거리 - 서영은 비오는 거릴 걸었어 너와 걷던 그 길을 눈에 어리는 지난 얘기는 추억일까 그날도 비가 내렸어 나를 떠나가던 날 내리는 비에 너의 마음도 울고 있다면 다시 내게 돌아와줘 기다리는 나에게로 그 언젠가 늦은듯 뛰어와 미소짖던 모습으로 사랑한건 너뿐이야 꿈을꾼건 아니었어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수 있는걸 그날도 비가 내렸어 나를 떠나가던날 내리는 비에 너의 마음도 울고 있다면 다시 내게 돌아와줘 기다리는 나에게로 그 언젠가 늦은듯 뛰어와 미소짖던 모습으로 사랑한건 너뿐이야 꿈을 꾼건 아니었어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수 있어 사랑한건 너뿐이야 꿈을 꾼건 아니었어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수 있는걸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수 있는걸 너만이 차가운 이 비를 멈출수 있는걸
물망초의 비밀 - 서덕준 당신은 봄볕 하나 주지 않았는데 나는 습한 그늘이었는데 어찌 당신을 좋아한단 이유만으로 이렇게 꽃을 틔웠습니까.
긍정적인 밥 - 함민복 時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이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에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하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며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