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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왼손으로 - 이제니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꽃기침 - 박후기 꽃이 필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 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 할 때, 한 시절 서로 끌어 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고지는 꽃들이 하얗게 몸살을 앓는 봄 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아픈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있는..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난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방명록 - 김경미 넓고 따뜻한 식빵 가슴에 안겨봤으면 좋겠어 분꽃 같은 대롱 입 타고 내려가 종일 그 가슴의 내부를 살아봤으면 좋겠어 진실을 눈썹처럼 곰곰이 만져봤으면 좋겠어 한 장의 그대 사진과 라일락나무와 나, 셋이서 나직이 약혼했으면 좋겠어 추억이 돌아서서 타조처럼 다시 뛰어와 화해의 밤을 얘기하고 오늘도 잊지 않고 내일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 내가 누구인지 이름 남길 수는 없지만
사랑스러운 추억 -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포옴에 간신이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운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가고-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 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미안하다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너 누구니? - 홍영철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농담 - 유하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었군요 ...... 미안해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이별의 일 - 심보선 너와 나의 일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피아노가 된 나무 - 김경주 #1 저녁이면 물조리개를 들고 피아노에 물을 주러 오는 남 자가 있다 피아노에 꽃이 핀다고 믿는 남자의 관성이다 #2 손톱을 물어뜯는 여자는 좋아한다 손톱을 물어뜯는 남 자를. 이유 없이 헤어진다 손톱은 손가락들과. #3 여자가 자신의 집으로 피아노를 훔치러 들어갔다 남자 와 여자는 피아노에 새장을 달아주고 바다 속에 가라앉혔 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손가락을 밤새 빨아주었다 #4 바다 속 피아노가 오늘은 날 좀 안아줘 피아노가 열 개 의 구멍으로 말한다 남자가 열 개의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운다 이것은 새가 살 수 없는 구멍에 대한 관성이다 #5 피아노에서 꽃이 핀다고 믿는다 그것은 나의 비운이래 도 좋고 너의 불멸이 아니라도 좋다 피아노가 된 나무가 오래전 꽃이 피었던 자리를 생각하는 밤 피아노는 나무..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 묻질 않어 그냥, 그래 /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 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하늘의 천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i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
눈 오는 지도(地圖) -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다정에 바치네 김경미
겨울일기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인연설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해주지 않음을 노여워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 말고, 애처롭게 한 사랑이라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으로 여겨 함께 기뻐하고. 알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그의 기쁨으로 인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후회하지 않는 이별은 없다 - 이종근 가슴이 시리도록 아파하는 허망한 것인 줄 알면서도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사랑한 것입니다 당신과 만남은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외로움의 끝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행복의 시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칼날처럼 잘못 다루면 깊은 상처를 내 그 아픔으로 눈물이 비 오듯하고 죽을 만큼 사무침으로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에다 대바늘로 참을 인(忍)자를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옆에 있을 때 등한시했다가 멀어지고 나서야 귀하다는 것을 알아 후회하는 것으로 상흔이 영원히 가슴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사랑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엔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풀 - 박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삭 - 박성준 애인의 아이를 지우고 건너온 밤 도무지 어디가 아픈 줄을 몰라서 울음이 났다 그토록 발작하던 햇빛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모두 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저녁 책가방 대신 애인을 업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빠져나간 것이 있다는데 더 무거워진 애인 그 중력이 싫었다 가슴팍에 돌돌 마린 우주야 한 근 떼 온 소고기가 손끝에서 잘랑거리는 거추장스러운 중력이 싫었다 핏물이 다 빠지지 않은 소고기에 미역을 둥글게 풀며 지구가 자꾸 돈다는 게 갑자기 느껴졌지만 다 기분 탓이라고, 아랫배를 쥐고, 자꾸 나오지 않는 오줌을 싸겠다 애쓰는 애인에게 나는 느닷없이 화를 낸다 다 기분 탓이라고 애인은 내 화를 다 받아주면서 짜증 대신 화장실 문을 닫는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변기에서 물이 흘렀으며 좋겠다 어딜까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