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시 (121) 썸네일형 리스트형 녹슨 도끼의 시 - 손택수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텅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을 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 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 소리가 저 절로 터져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 모퉁이를 돌다 - 이제니 어느날 당신 앞에 모퉁이가 나타난다 모퉁이는 당신이 보았거나 보게 될 한없이 이어진 몇 개의 선분이다 당신은 모퉁이를 돌며 모퉁이라고 발음하고 모퉁이라고 발음하며 모퉁이를 돈다 모퉁이는 돌거나 그냥 지나칠 수 있다 오늘도 모퉁이는 당신에게 사라지거나 나타날 것을 종용한다 모퉁이는 지나치고 모퉁이는 냉정하고 모퉁이는 어둡고 모퉁이는 발생 가능한 사건의 형태로 존재한다 당신은 모퉁이를 돌면서 위를 쳐다본다 하늘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다고 되뇌면 보고 싶은 감정이 더할까 덜할까 이것은 문장으로 연습해보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다 삼각형 사각형 각진 도형들의 감각으로 위로받고 싶은 모종의 마음이다 새장의 새처럼 새의 새장처럼 휘날리는 은빛 깃털처럼 은빛 깃털의 휘날림처럼 당신은 약간의 온기만 있으면 족하.. 내가 놓친게 있다면 - 지혜 이 길고 괴로운 새벽을 보내고 내일을 온전하게 맞이하려면 한 시간 이라도 빨리 잠에 들어야만 할 것이다. 베개의 가장자리가 축축했다. 그런 한 때를 보내고 나면 어떤 일들은 그럭저럭 괜찮아지고, 어떤 일들은 오랜 상처로 남아 나중엔 흉이 질 것이다. 무수히 많은 날 중에 오늘은 아무도 모르게 상처를 받고 혼자인 날이었다. 단지 간혹 찾아오는 그런 날이다. 창밖에 붉고 푸른 동이 틀때까지, 동이 트고 하늘이 밝아지기 전까지만 너는 또 봄일까 - 백희다 봄을 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름이 오면 잊을 줄 알았는데 또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 걸 보면 너는 여름이었나 이러다가 네가 가을도 닮아있을까 겁나 하얀 겨울에도 네가 있을까 두려워 다시 봄이 오면 너는 또 봄일까 벽과 문 - 천양희 이 세상에 옛 벽은 없지요열리면 문이고 닫히면 벽이 되는오늘이 있을 뿐이지요새로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이사실은 문제지요닫아걸고 살기는 열어놓고 살기보다한결 더 강력한 벽이기 때문이지요벽만이 벽이 아니라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절벽 또한 벽이지요절망이 철벽같을 때새벽조차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지요세상에 벽이 많다고 다낭비벽이 되는 건 아닐 테지요벽에다 등을 대고 물끄러미 구르을 보다 보면벽처럼 든든한 빽도 없고허공처럼 큰 문은 없을 듯하지요이 세상 최고의 일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 자 그럼 열쇠 들어갑니다벽엔들 문을 못 열까문엔들 벽이 없을까 회색이 될까 - 최현우 하루가 망가졌다고 생각하면 손을 씻었다 시간을 부순 공구가 철로 된 연장은 아니겠지만 마음을 망치는 것들은 피 냄새가 나니까 시를 읽는 사람이 무대에 올라 조명을 쬐고 있다 빛과 소리가 섞여 객석으로 넘친다 관객들이 말을 가두고 저녁에게 어둡고 차분한 길을 터주고 종일 무거웠던 목젖을 누르며 걸어 지나가는 목소리 면접관 앞에서 떨었던 오후에는 햇빛에 다른 빛이 들떠 번들거렸다 한참을 걷다가 간이화장실에 들어가 표정에 비누칠을 했다 웃음과 울음이 빠르게 점멸하는 얼굴을 세척하는 박수 소리 낭독자는 인사의 예절로 빛에 멀리를 헹군다 빛은 그다음의 빛을 견디기 위해 잘 섞어두려고 했는데 나는 수많은 질문을 놓치고 허튼 대답을 했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들의 찬란 속에서 운명을 반사할 별자리의 모양을 찾으려다가 .. 빛은 영원히 영원한 어둠에게도 갔다 - 박시하 롤로는 바다에 유리병을 던졌다 바다의 속은 깊었다 손을 뻗어도 저 아래 감은 눈 눈빛이 지워진 눈 차가운 입술에 닿을 수 없었다 숨을 멈추면 가라앉을 거야 발목에 사슬을 채울 거야 메이, 보고 있니? 영혼들이 반짝이며 떠 있어 롤로는 더 어두워질 수 없어서 입을 벌리면 노래가 흘러나왔다 죽어야 따스해질 밤의 바다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데 마르지 않았다 식물의 냄새가 나겠지 뼈만 남은 음성이 시를 읽겠지 너, 가니? 이미 갔니? 돌아오지 마 너무 울지도 마 메이의 살은 오래전에 썩어버렸지만 낡은 심장은 뛰었다 파도 파도의 숨을 따라서 뛰었다 롤로 롤로 하며 뛰었다 아름다운 걸 줄 거야 물속에서만 바볼 거야 문득, 어둠은 빛을 떠났다 7인분의 식사 - 이민하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두 사람은 얘기하고 두 사람은 웃고 한 사람은 빈 의자 옆에 앉아 창밖을 본다 악수는 셋이서 못하나? 일곱 이서 손을 잡으면 그건 체조가 되나? 밖에는 흰 눈이 목련꽃처럼 떨어지는데 일곱 사람이 모이면 1인분의 밥공기처럼 일곱 개의 우정이 분배될까 번갈아 짝을 맞추면 스물한 개의 우정이 발명될까 서넛씩 대여섯씩 뭉치면 동심원처럼 늘어나는 기하급수의 우정을 위해 종소리가 울려 퍼지듯 주방에는 낡은 냄비 낯선 냄비 동시에 끓고 일곱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면 세 쌍의 대화와 한 명의 독백이 발생할까 한 쌍의 대화가 탱크처럼 독백 위에 지나가고 세 쌍의 대화가 함께 폭발하면 거대하게 부푸는 핵구름 아래서 내통하는 입과 귀가 몰래 낳는 기형의 비밀들 목을 비틀면 벌컥 거품부터 입에 무는 맥..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 이원 7cm 하이힐 위에 발을 얹고 얼음 조각에서 녹고있는 북극곰과 함께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불이 붙여질 생일 초처럼 고독하다 케이크 옆에 붙어온 플라스틱 칼처럼 한 나무에 생겨난 잎들만 아는 시차처럼 고독하다 식탁 유리와 컵이 부딪치는 소리 죽음이 흔들어 깨울 때 매일매일 척추를 세우며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출판기념회처럼 고독하다 영혼 없는 영혼처럼 코스프레처럼 고독하다 텅 빈 영화상영관처럼 파도 쪽으로 놓인 해변의 의자처럼 아무 데나 펼쳐지는 책처럼 우리는 지구에서 고독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햇빛과 함께 문의 반복처럼 신발의 번복처럼 번지는 물처럼 우리는 고독하다 손바닥만한 한 개의 목줄을 매고 모든 길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가 매겨진 상자 안에서 천 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저장한 휴대폰을 옆에 두.. 자목련 색을 닮은 너에게 - 서덕준 너를 생각하면 우주 어딘가에서 별이 태어난다 폭우가 나에게만 내린다 지금 당장 천둥이라도 껴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길의 모래를 전부 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름만 읊어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눈물겨워진다 그리움이 분주해진다 나에게 다녀가는 모든 것들이 전부 너의 언어 너의 온도 너의 웃음과 악수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모두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저무는 것들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속내가 되지 말자 - 이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속내가 되지 말자 서로에게 어떠한 속내도 되지 말자 서로에게 서로가 아닌 무엇도 되지 말자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아닌 어떤 속내가 되지 말자 어떠한 속내도 되지 말자 서로에게 무엇도 되지 말자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속내가 되지 말자 서로에게 어떠한 속내도 되지 말자 서로에게 서로가 아닌 무엇도 되지 말자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 - 이훤 백치 바나나 - 이민하 옆 반에서 칠판을 지우던 아이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그러면 훗날 좋아한 사람들은 첫사랑이 될 수 없나. 믿지도 않으면서 너는 묻기만 한다. 그래 그럼, 아마 다섯번째거나 스무번째쯤? 다섯과 스물 사이에는 반올림된 사랑도 숨어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키스를 몇 번 했니? 그렇게 묻는다면 덜 헷갈릴 텐데. 강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저녁 별 - 이정하 너를 처음 보았을 때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너를 바라보는 기쁨만으로도 나는 혼자 설레었다. 다음에 또 너를 보았을 때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를 깨닫고 한숨 지었 다. 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내 마음에 자꾸만 욕심이 생겨나고 있었던 거다.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 - 오은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 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 미래니까,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 태풍의 눈 - 서덕준 내 마음 초롱한 입구 어귀로 잠잠히 새벽이 뒷걸음친다. 어서 와, 어서 와. 마음의 횃불 사이로 떨어지는 불꽃에 가만스레 얼굴을 씻는 그대야. 너의 잔잔한 파문에도 나는 사정없이 꽃이 되어버려. 이 내 꽃을 거둘 생각은 없니? 말린 꽃잎이 되어 네 달콤한 일기장에 갈피가 되마. 무참히도 고요한 너의 미소가 내 혈관 속을 헤엄쳐. 나의 체온은 곧 네 입술의 온도가 되고, 불현듯 네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 것은 비밀로 하자. 그대야, 그대는 가만있었는데 왜 내게는 없던 바람도 불어와? 왜 나를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어?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이희형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하나씩 미루어지는 동안 봄은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고 매일 한명 이상의 사랑이 죽고 병에 걸리는 일이 계속되면서 마스크는 이제 일주일에 한번만 살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월요일에 약국에 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거리라는 것도 갖게 되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겨우 생겨나다가 그것은 이제 모두를 위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꽃은 다 져가는 중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만큼의 자리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게 꼭 누군가의 빈자리 같은데요 그럼에도 벚꽃 잎이 비처럼 내리는 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파트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으면 떨어지는 잎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던 일 그건 가볍고 그건 아름다워서 나는 손을 자주.. 사과시럽눈동자 - 임현정 병에 담긴 달콤한 시럽 영원히 깨지 않아도 좋아 네 눈동자가 될 수 있다면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 서윤후 고요를 흥청망청 쏟으며 마음을 읽으려고 했던 날도 있었다. 가끔은 우울 하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고, 슬픔은 남몰래 귀신처럼 내 몸을 빌려 청승 을 떨었다. 종이 위로 첨언하는 나는 지나치게 인간다워서 인간이 되려 고 한다. 자기 몸을 돌보게 되었고 좀먹어가는 곳은 애써 손대지 않는 다. 살면서 닮게 된 부분과 다시 손쓸 수 없이 딱딱해진 부분이 닿을 때, 쓰 는 손은 차갑고 차가운 손을 응시하는 것은 아마 따뜻함의 곤욕스러움 을 잘 아는 것일 것. 나는 다정함을 벌칙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나의 슬픔 을 비틀더라도 양보다 크게 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주 웃음이 나 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 서윤후 속눈썹 - 류시화 너의 긴 속눈썹이 되고 싶어 그 눈으로 너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 네가 눈물 흘리 때 가장 먼저 젖고, 그리움으로 한숨지을 때 그 그리움으로 떨고 싶어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