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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이희형

굿 이너프 2020. 6. 25. 23:24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 하나씩 미루어지는 동안
봄은 다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해가 바뀌고
매일 한명 이상의 사랑이 죽고
병에 걸리는 일이 계속되면서
​마스크는 이제 일주일에 한번만 살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월요일에 약국에 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거리라는 것도 갖게 되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겨우 생겨나다가
그것은 이제 모두를 위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꽃은 다 져가는 중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한 사람만큼의 자리가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게 꼭
누군가의 빈자리 같은데요
그럼에도 벚꽃 잎이 비처럼 내리는 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파트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으면
떨어지는 잎들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던 일
그건 가볍고 그건 아름다워서 나는 손을 자주 뻗었고 손등에 내려앉은 꽃잎 몇장을 자주 생각했지만
떨어진 잎은 결국 떨어지게 되는 것이라
결국 아름다운 건
언제나 단 한번뿐이었는데요

​그런가 하면 비 내릴 때 물을 잔뜩 머금은 꽃잎들이 달콤한 과일처럼 후두둑 떨어지고 땅바닥에서 빗물이 터지는 이런 날에 나는 침이 고여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삼월이 다 끝났는데도
아무도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을 테지만

​한번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는 것과 이미 보았던 영화를 돌려 보는 것을 나는 좋아합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과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을 당신의 목소리로 다시 들어보는 일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러다보면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 사람이 너무 멀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요 만나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람들이 분명

​지금도 막 생겨나는 중인데
나는 천천히 꽃잎을 맞고 있는 중입니다
봄은 계속해서 떨어져가고 있는데요

​아마도 이때쯤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가 선물로 주었던 시계를 잠시 말려두려다
어딘가에 두고 돌아와버린 건

​아마도 지금일 것입니다 누군가
길가에 가지런히 놓인 벚나무를 따라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건

​느리게 날아가는 꽃잎이 그의 등 뒤로 따라가 묻습니다
이게 정말 끝은 아니라는 듯이

​길 끝에서 등은 단호한 모습으로 사라집니다
이제 끝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벚나무 밑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머리 위로
가만히 꽃잎이 쏟아져버릴 때